"30년 경찰생활, 후회는 없다"
"30년 경찰생활, 후회는 없다"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5.04.2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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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토크 21번째 손님, 임국빈 서장



“30년 경찰생활,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엄격한 잣대로 자기 일을 추진하는 명사들이 술의 힘을 빌어 가슴에 담아놓은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취중토크가 재개된다. 본지는 다시 한 번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스물한번째 취중진담 명사로 음성경찰서장으로 50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임국빈 총경(58)을 초대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학창시절 간부후보생에 수석합격, 지금까지 경찰을 천직으로 살아온 임국빈 서장. 그는 지금 고향 음성에 경찰서장으로 돌아와 친구, 후배, 선배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고향의 정을 듬뿍 느끼고 있다.

아이돌 못지 않은 단단한 몸에 훈남 임 서장은 인터뷰 내내 날카로운 눈매사이로 자상한 남편으로, 부드러운 아버지로, 정도(正道)를 걷는 경찰로서의 삶의 편린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Q 음성경찰서장 취임식에 앞서 이례적으로 음성군 노인회를 방문했습니다. 특별히 어르신들을 방문한 이유가 있습니까?

A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겪고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부(富)를 일구고 살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바탕이 됐지만 특히 일제시대에 나고 자라 4·19, 5·16을 겪은 우리 부모세대의 일방적인 희생 덕분입니다.

지난 날 국가와 사회발전의 주역으로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각박한 삶 속에서 소외되시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앞으로 노인이 편안하고 행복한 음성군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표출된 것입니다.

Q 효심이 지극하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A 위로 누님이 세분 계시고 제가 태어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들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던 터라 땅에 발을 대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나름 '왕자'로 자랐습니다. 지금도 가끔 아내가 왕자병이 도진다고 합니다(웃음). 당시 소이면 서기로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러운 것 없이 저를 키우셨습니다. 누나가 왕복 60리 길을 걸어 음성중학교를 다니며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제가 대장초등학교 4학년때인 45세에 면 서기를 그만두시고 충주로 이사를 감행하셨습니다.

본인의 인생보다 아들사랑이 더 컸던 분이셨어요. 부모님은 서로 정이 많으셨고 한 번도 큰소리를 내거나 매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경감 때, 67세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3년 후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를 가장 존경합니다.

Q 어린시절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셨습니까?

A 대장초등학교에서 충주 남한강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니 아이들이 어찌나 똘똘한지 시골에서 온 저를 완전히 무시하는 겁니다. 내성적이었던 저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시험에서 자연과목인지 100점을 맞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애들이 저를 달리 보더라구요. 당시 저희 집은 소농이었고 방과후 애들은 소를 먹이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저희집은 소가 없었는데 저는 그것이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중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고

등학교 진학을 위해 청주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의 실수로 친구들은 다 붙고 저만 떨어졌습니다. 저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도 붙어서 저는 물론 선생님께서도 놀라셨죠. 저 역시 충격이 커서 충북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절치부심(切齒腐心) 공부에만 열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Q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시절 간부후보생 시험에 수석 합격했습니다. 경찰이 꿈이셨습니까?

A 당시 문과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은 법대에 들어가 법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지만 법대와 인연이 없는지 두 번이나 탈락했습니다. 경희대에서 4년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담임선생님께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권유했습니다.

경찰행정학과가 동국대에 처음생겼고 저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신것 같습니다. 저도 법관이나 경찰이나 같은 길이라 생각해서 결국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대학 4학년때 간부후보생 시험에 수석 합격했고 4등으로 졸업후 85년에 서울경찰청 성북경찰서로 경찰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후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를 마쳤구요. 그간 지내온 과정을 보면 훨씬 잘나가는 사람들 보다 늦게 승진했거나 더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는 부끄럽지 않은 경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늘 정도(正道)를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은 있을지 몰라도 후회는 없습니다.

Q 2005년 총경에 임용되셔서 경찰서장으로 10년을 보내셨습니다. 경찰서장은 어떤 자리이며, 기억에 남는 사건사고가 있습니까?

A 주변에서는 '경찰서장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늘 힘들다고 합니다(웃음).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이지만 경찰서장은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직원이 사고를 낼 수 있고, 검거하다 다칠 수도 있습니다. 범인이 다치는 경우도 있구요. 한번은 서울 금천서장으로 근무할 때에 만취한 노숙자가 파출소 내 의자에서 자다가 떨어져 뇌진탕으로 숨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담당자는 징계를 받는 등 힘들었어요. 공직의 어려움이라고 봅니다.

Q 부임하시고 대외적인 경찰 활동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특별히 경찰 홍보에 주력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A 경찰의 존재 이유는 주민입니다. 지역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는 범인검거에 앞서 예방이 중요합니다. 제가 처음 경찰이 됐을 당시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절로 경찰의 이미지가 나빠지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찰은 많은 부분 금전과 연관돼 있었고 그런 경찰은 결국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고 그런 일에 연루될까봐 늘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늦게 승진했나 봅니다(웃음). 일부이긴 하지만 지금도 경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요.

그동안 고문, 부정부패, 데모 단속 등 경찰이 주민을 괴롭히는 존재로 인식돼 온 거지요. 주민들도 경찰의 좋은 면을 볼 기회가 없었다고 봅니다. 주

민이 찾아오면 일어서서 맞이하는 등 따뜻한 모습, 공정하고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홍보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Q 음성경찰서는 군민 수로 보면 2급서가 돼야 하는데 직원 수로 보면 3급서입니다. 고충은 무엇입니까?

A 고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희 음성경찰서에는 총 185명의 경찰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업무 대비 직원이 적어서 모든 직원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미안하고 고맙지요. 이를 보완해 지역 곳곳에 설치된 CCTV가 범죄예방에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설치돼있는 410여 대의 CCTV를 군과 협조해 계속 늘려 나갈 방침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청, 모범운전자회, 해병전우회, 자율방범대, 교통안전협회 등 지역 주민단체의 협조가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경찰이 놓치는 부분을 지역 사회단체에서 많이 보안해 주고 있어 그것 또한 감사합니다.

Q 특히 음성경찰서가 주력하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사회4대악 근절 입니까?

A 물론입니다. 국민안전을 위해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의 4대악 근절은 치안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특히 음성은 아무래도 농촌이다보니 농축산물 절도단속이 큰 관심입니다.

둘째는 음성이 외국인 밀집지역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탈북민도 청주, 충주에 이어 세 번째로 많습니다. 그들의 신
변보호와 함께 그들이 어려움없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경찰의 일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지역이 전체 교통사고의 10%에 이를 정도로 어르신 교통사고가 많습니다. 어르신 교통사고 예방홍보도 경찰의 주요업무입니다.

넷째는 경운기 사고 예방활동으로, 특히 야간 경운기 운행사고방지를 위해 태양열 경광등 설치는 큰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다섯째는 사회복지단체와 협의해 독거노인가정을 돕는 일입니다. 위생에 취약한 어르신가정에 도배 등을 해주고 있는데 저희 경찰은 짐을 옮겨주는 등 소소한 일을 돕고 있어요. 또 가정폭력에도 적극 개입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가정폭력 신고율이 10%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는 결국 아이들입니다. 또 학교폭력에도 관여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두 귀하게 커서 작은 피해가 큰 상처가 되고 결국은 자살로도 이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더 큰 문제는 일부 아이들이 조폭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신분 세탁해 외제차를 모는 조폭들을 아이들이 겉만 보고 따라가려는 거죠. 특히 저희 음성경찰은 학교에 젊은 경찰을 배치해 아이들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젊은 오빠, 형 같은 경찰이어야 학생들과 소통하고 이해하면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까요.

Q 상당히 애처가라는 소문입니다. 프로포즈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A 아내(55·박영숙)와는 간부 후보생 때 매형에게 소개받아서 만난 지 일 년 만에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당시 임시교사로 있었는데 매우 예쁜 아가씨였어요(웃음). 사귀었으니까 당연히 결혼해야한다는 생각이었고 특별한 프로포즈는 없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매우 소극적인 성격이었고 적극성이 떨어졌던 것 같아요.

Q 주말부부로 지내시는데 사모님과는 자주 연락하십니까?

A 그럼요. 저희 부부는 매일 아침 7~8시, 저녁 8~9시 하루 두 번 꼭 전화통화를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부부관계가 좋습니다. 아내와 나는 생체리듬이 정 반대인데 서로 배려하니까 큰 문제 없이 잘 지냅니다.

테니스, 골프 등 운동도 같이 즐기고 서로 떨어져 지내지만 서로의 생활을 존중합니다.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고 가족에 헌신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아내는 현재 다도, 미술 등 취미활동을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아내 얘기를 하니까 생각나는데 저는 과거 아내말을 안들어서 더 부자(?)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웃음).

지난날 저는 집을 마련할 때마다 아내와 옥신각신했습니다. 저는 늘 말리는 입장이었는데 나중에 보면 아내가 가자고 한 아파트는 천정부지로 오르더라구요. 최근엔 아내 말을 들었는데 오히려 떨어지더군요. 과거 부동산 투자 감각이 있는 아내 말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합니다(웃음).

Q 지난 생신에 따님이 경찰서로 떡을 보내와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들었습니다.

A 슬하에 딸 둘,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제가 크게 출세하거나 잘 살지는 못하지만 애들이 올바로 자라고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이 자랑이라면 자랑입니다. 특히 첫째 딸을 낳았을 때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을 때로 기억합니다. 그 딸이 1년 전 결혼했는데 이번 생일에 경찰서로 축하 떡을 보내왔고 적은 돈이지만 용돈을 보내와서 크게 감동했습니다.

둘째 딸은 사회복지사 1급으로 현재 숭실대학원에 재학 중입니다. 아들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힘들 때 보관하고 있는 어릴적 아이들이 쓴 편지를 읽으면 힘이 나고 애들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이들은 저에게 큰 보물들입니다. 단점이라면 애들이 아빠를 닮아서인지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문제입니다(웃음). 요즘 저는 술을 멀리 하고 있습니다.

Q 긴장 속에서 지내시다보면 스트레스도 많으실텐데 평소 건강관리와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고 계십니까?

A 성격상 늘 긴장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풀어버립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과거에는 술을 많이 마셨지만 지금은 약간의 통풍징조가 있어서 술을 안마시려고 합니다.

오늘은 취중토크니 딱 두잔만 마시겠습니다(웃음). 현재 176cm 키에 77Kg인데 체중조절 중입니다.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있습니다. 운동은 매일 아침 5시반부터 두시간 정도 강하게 테니스를 치면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더 이상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또 수시로 걸으면서 상쾌한 바람을 맞는 것을 좋아합니다.

Q 취미가 음악감상이라고 하시던데요.

A 피아노를 전공한 큰 딸 덕에 좋은 음악을 많이 접한 탓입니다. 장르는 교향곡을 즐겨듣고 특히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좋아합니다.

운명교향곡은 베토벤이 청각에 이상을 느끼던 시기 작곡된 것으로 운명 교향곡으로 이름 붙은 것은 베토벤의 제자가 베토벤에게 이 곡에 대해 물었을때 베토벤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리듯이 찾아온다'라고 말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Q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A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아시다시피 무엇이 됐든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 결과는 운명에 따르겠다는 것이잖습니까. 제 누님중 한 분이 30대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님도 그래서 일찍 돌아가셨나 싶어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다는 생각입니다.

Q 고향 경찰서장으로 취임후 왕성한 활동으로 혹자는 혹시 정치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A 음성경찰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날 몇몇 지인들이 퇴임 후 고향에서 지방선거를 준비해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덕담으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취임식 때 공개적으로 '할 마음 없다'고 정확하게 밝혔습니다. 정치는 평소에 지역에서 꾸준히 봉사하고 주민과 교류해 온 지역주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Q 꿈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십시오.

A 내년 6월 퇴임인데 저도 오래전부터 준비해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후학양성의 길을 걷기 위해 한성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과에서 박사과정 3학기 째입니다. 대학에서 경찰행정학과와 석사로 행정학을 하고 경찰로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대학에서 후배를 가르치는 것이 경쟁력 있다는 생각입니다. 토요일마다 학교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박사논문 준비해야하는데 고민입니다(웃음).

Q 마지막으로 고향 주민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죠.

A 고향에 돌아오니 참 푸근하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치유되는 느낌이랄까요. 감사하고 있습니다. 경찰로서 고향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결과만 보지 마시고 과정도 봐주십사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얼마전 한 여학생이 가출을 해서 많은 경찰들이 투입돼 밤샘도 마다 않고 학생을 찾아 나섰습니다. 결국 여학생은 친구 집에서 발견됐습니다만 학생을 찾기까지 부모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경찰들은 사건해결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사건은 과정도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경찰이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주민 여러분께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사건해결 과정의 어려움을 이해해주시면 경찰은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음성경찰서는 앞으로 지역주민에게 자식같은, 형제같은 친근한 경찰로 다가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행·글 / 이상훈 대표기자
사진 / 임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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