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국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음성군지회장
김 용 국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음성군지회장
  • 임요준
  • 승인 2017.09.26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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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불편하지만 사랑과 희망은 넘쳐요”
▲김용국 회장과 아내 원영자 여사가 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는 소들을 돌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김용국 회장과 아내 원영자 여사가 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는 소들을 돌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교통사고로 한 순간 두 다리 잃고 절망의 늪에 빠져
'하면 된다'… 소 키우며 장애인 재활 위한 봉사의 길

가을의 문턱에서 보내는 계절이 아쉬운 듯 하염없는 빗줄기가 내리던 늦은 여름날. 전형적인 농촌마을 한 축사에 두 다리를 모두 잃은 채 전동휠체어를 움직이며 빗속을 헤치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음성군지회 김용국(67) 회장이다.

반토막 난 몸으로 36 년을 살아온 김 회장. “두 다리를 잃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까지...그것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자신과의 싸움 이였습니다” 그의 기구한 삶속으로 들어가 보자.

참외농사 부모따라 음성과 인연

1950년 전북 임실군 성가리란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7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회장. 어려운 가정형편에 중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김 회장. 꼴머슴부터 공장일까지...

그러던 그의 나의 17세. 참외농사를 짓겠다는 부모님을 따라 이곳 음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김 회장은 도시에서 일을 하겠다며 상경, 신당동 한 직물공장에서 공장 일을 시작했다.

여름휴가 때다. 짬을 내 시골집에 내려왔다. 이때 한 동네 처녀를 소개받았다. 원영자(64) 여사다. 군 병장 때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백년해로는 시작됐다.

12톤 트럭에 치어 불구의 몸

꿈같은 신혼생활이 지나고 어느새 딸 넷을 둔 가장이 됐다. 가족이 늘면서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갔다. 가장으로서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일념에 경상도 삼량진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 그리움에 밤 열차에 올랐다. 새벽에 도착한 그는 눈 붙일세도 없이 오토바이를 끌고 장호원시장에 들렀다. 아이들 먹일 고기며 과자 등을 챙겨들었다. 기뻐 펄펄 뛸 아이들 모습을 상상하며 집을 향했다. 얼마지 않아, 아뿔사! 그의 오토바이가 12톤 트럭 밑으로 빠져 들었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두 다리는 힘없이 잘려 나갔다. 그의 나이 32살. 불타는 청춘에 두 다리를 잃은 불구자가 되고만 것이다.

의식불명 속 3일이 지났다.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두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에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절망, 암흑,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당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리...입원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왜 살렸냐'고 원망도 했다. 원망스런 하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어 댔다. 그의 방황은 끝없는 터널을 향해 급속도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들 탄생 '새 희망' 축산 시작
술 없이 지내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사람 만나는 게 싫었다. 친구도 친척도, 동정하는 말투는 더 싫었다. 보상금은 곶감 빠지듯 한푼 두푼 빠져나갔다. 그러기를 2년. 딸 넷의 아버지가 아들을 얻었다. 그는 하늘을 버렸어도 하늘은 그를 버리지 않은 것. 그 순간 그 또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원망했던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렸다. 마음을 다잡고 처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축산업이다. 강아지와 돼지 사육을 시작했지만 연거푸 실패였다. 소로 축종을 바꿨다. 7마리를 구입했다. 예방접종 방법을 배웠다. 사료 먹이는 방법도 익혔다. 배설물 청소는 부인 원씨의 몫이다. 드디어 성공이다.

소들은 부부의 간절한 소망을 알고 있는 듯 잘 자라주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한국에 경제위기다 닥쳤다. 한국경제는 IMF의 손에 넘어갔다. 이때 마리당 165만원에 65마리를 구입한 소가 만삭임에도 150만원에 넘어갔다. 2억 원이라는 빚더미에 안게 된 것이다. 당시 이자만도 12%로 고금리였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1급 장애인이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못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의지의 문제였다.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예방주사, 혈관주사 등을 손수 해냈다. 50마리로 늘었다. 우사도 200평으로 확장됐다.

장애인협회 등 봉사자로 나서

하늘이 주신 은혜, 이젠 남들에게 나누고 싶었다.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다짐한 김 회장은 몇몇 뜻을 같이하는 장애우들과 함께 1990년 음성군장애인협회를 설립했다. 장애인의 권익보호와 사회참여를 위해 헌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15년 간 협회를 이끌어 온 한명석 전 회장에 이어 2005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봉사해 오고 있다. 이후 음성군장애인협회는 분야별 시각장애인협회와 지체장애인협회, 교통장애인협회, 신체장애인복지회로 나눠져 활동하고 있다. 이중 김 회장은 교통장애인협회와 신체장애인복지회를 맡고 있다. 또한 교통장애인운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회장의 노고에 대해 2006년 장애인재활자립상인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장관상과 2년 뒤 올해의 장애극복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장애를 가졌다고 주저앉지 마세요. 몸에 의존하려 하지 마십시오. 도움 받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반토막 몸으로 소를 키우고 있습니다”며 “열심히 하다보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장애는 단지 불편할 뿐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고 말하며 얼굴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정열의 30대 청년이 한 순간 불행의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절망의 늪에서 아들의 탄생으로 새 희망을 가지며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다시 일어섰다. 걸을 수 있는 다리는 잃었지만 굳게 설 수 있다는 마음의 다리만큼은 튼튼하기만 하다. 조금만 힘들어도 주저앉고 마는 요즘 세대에 김 회장은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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