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옥 이 (사)음성군새삶인협회장
유 옥 이 (사)음성군새삶인협회장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17.10.19 1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선 넘어 얻은 생명, 탈북민 정착촌 만들고파
▲ 사선을 넘어 자유의 품에 안긴 유옥이 음성군새삶인협회장이 탈북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 사선을 넘어 자유의 품에 안긴 유옥이 음성군새삶인협회장이 탈북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굶주린 가족 살리겠단 일념으로 두만강 넘어 탈북
남편 고향 '음성'서 마늘농사 지으며 6차 산업 선도


“조카가 태어났어요. 하지만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해 아기는 빠짝 말라 뼈만 앙상했어요. 시간이 갈수록 영양상태는 더 부족해 결국 손가락이 비틀어지면서 죽었어요”

북한의 현실을 전하는 음성군새삶인협회 유옥이(50) 회장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내 뺨을 타고 주루룩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되었다.

고향 산천을 버리고 남한땅에 두 발을 딛기까지 수많은 사선을 넘었던 그녀의 기구한 삶속으로 들어간다.

굶주린 가족 보며 탈북 결심
유 회장은 악명 높기로 알려진 아오지탄광이 있는 함북 운덕군 아오지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전쟁 고아였다. 건설현장에서 만난 두 분은 아이를 임신하였지만 밤에 덮을 이불조차 없는 상황에 옷을 찢어 이불을 만들어 5남매를 근근이 키웠다.

전문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 유 회장은 23세에 결혼했지만, 굶는 것을 밥 먹 듯해야 하는 현실은 고통 그 자체였다. 자신의 배고픔보다 어린 자식과 조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모습을 손 놓고 지켜봐야 하는 처지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남동생 하나는 가족들 먹이겠다고 회사에서 동선을 훔쳐 중국인에게 판 것이 발각돼 죽임을 당했다. 다른 하나는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끼워둔 액자유리를 팔아, 먹을 것을 마련한 것이 알려져 정치범이 되었다. 결국 교도소에서 매를 맞다가 간이 손상돼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밥벌이 '재봉기' 사 올게
“더 이상 가족들을 죽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지경 이였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가족들 먹여 살릴 생각 하나로 탈북을 결심했다. 1998년 6월 여름의 문턱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목적은 단 하나. 중국에서 열심히 일을 해 모은 돈으로 구두수선 재봉기를 사들고 다시 입북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생활은 순탄치만은 못했다. 식당에서 일을 하던 중 중국인 동료의 신고로 중국 공안에 잡혀갈 위기에 놓였다. 6년을 중국 공안을 피해 숨어살아야만 했던 그녀. “여기서 잡히면 강제 입북해야 되고, 그럴 경우 저도 저지만 가족들 모두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러 가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그녀를 이미 사망자로 신고했다.

사선 넘는 남한행

고향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중국에 머무를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놓인 유 회장. 조금만 고생해 재봉기 사들고 가겠다는 꿈은 더 이상 이룰 수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2004년 결국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남한행을 택했다. 처음에는 몽골을 거쳐 입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고 못하고 한 달 동안 산속에 숨어 지냈다. 다시 길을 찾은 그녀는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을 거쳤다. 메콩강을 건너며 흘린 눈물이 강물만 못하랴. 그녀의 눈물이 메콩강을 가득 채우던 그 때, 마침내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입국 당시 그녀에게 소지품이라곤 쥐약뿐 이였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을 이유에서다.

첫 운영 고깃집 사기 당해

수많은 사선을 넘어 찾아 온 대한민국은 그녀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정착자금 3000만원을 받고 전북 군산으로 배치됐다. 내륙에서만 살았던 그녀에게 바다에 접한 해양도시 군산은 너무 힘든 곳 이였다. 비린내에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경기도 포천으로 옮겼다. 음식솜씨가 뛰어난 유 회장은 주방장으로 스카웃되기도 했다. 얼마간 모은 돈으로 수원에 생고깃집을 열었다. 하지만 사기를 당하면서 1억 원이라는 큰돈을 한순간 날리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상황에서 음성의 한 축산농가에서 주방아줌마를 구한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농가주와 그녀가 처음 만나게 됐다. 그 분이 바로 지금의 남편 이상국(50) 씨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됐고 20일 만에 결혼에 이르렀다.

마늘농사로 탈북민의 희망 돼

이후 두 부부는 축산을 접고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직접 수확한 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첫해에는 2000만원 적자다. 여러 작물을 포기하고 마늘 하나로 가기로 했다. 2만평 밭에 마늘이 심어졌다. 성공적 이였다.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직접 생산한 친환경 퇴비만을 고집한다.

“마늘 생산에서 가공까지 할 계획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인력은 탈북민과 함께 해 그들이 정착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탈북민 정착촌을 만들고 일터에 어린이집도 운영할 겁니다. 영세민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계에 목메는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탈북민의 애환을 땅에 묻으며 마늘 하나로 새 희망을 꿈꾸는 유옥이 회장. 단순 농산물 생산에서 6차 산업으로의 발전을 꿈꾸는 그녀의 희망이 마늘쪽 영글듯 하나하나 익어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