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미 자 음성군지체장애인협회 총무
김 미 자 음성군지체장애인협회 총무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17.11.0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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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아픔 딛고 새롭게 펼치는 희망의 나래


사출공장서 일하다 기계에 빨려들어 오른손가락 모두 잃어
중증장애인 만나 새 희망, 각종 꽃꽂이·볼링대회 출전 수상

남자들도 일하기를 꺼리는, 그래서 외국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 금왕의 어느 사출공장에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 힘든 작업을 해내며 하루하루 열심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 기계소리 요란한 공장에 한순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오른손이 기계 속에 빨려든 것이다. 그러면서 다섯 손가락 모두가 잘려나갔다. 상상조차 힘든 고통의 순간이다. 음성군지체장애인협회와 다올찬볼링동호회에서 각각 총무를 맡고 있는 김미자(65) 씨의 당시 사고 상황이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잃고 힘든 삶을 살다가 이젠 세상 밖에서 당찬 인생을 엮어가는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부모 잃은 어린 소녀

김미자 총무는 대구시에서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운수업과 금방을 운영하셨기에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리며 자랐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인 그녀 나이 겨우 8세, 갑작스레 아버지께서 간경화로 운명하셨다. 가족 모두는 서울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그늘에서 가정주부로 살아오신 그녀의 어머니에게 하루아침에 맡겨진 가장의 역할은 힘겹기만 했다. 그나마 어머니마저 위경련으로 세상을 떠나자 남은 자식들은 이모의 그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 은로초등학교와 수도여중을 졸업하였으나 고등학교를 끝내 마치지 못하고 2학년을 끝으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학생의 신분을 벗자마나 그녀가 뛰어들 곳은 회사 뿐 이였다. 그러던 20세에 남편을 만나 3남매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꾸려갔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였지만 미용실과 옷가게를 운영하며 가정엔 웃음꽃이 피었다.
오빠 사업체 근무…음성과 인연
야속한 운명이여!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 역시 간경화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눈물과 한숨 속에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됐다. 이때 그녀의 아픔을 함께 해준 한 남자를 만난다. 지금의 남편 신진호(68) 씨다. 신씨는 그녀의 슬픔을 함께 나눈 더없이 고마운 분이다. 부부는 인천에서 조그마한 슈퍼를 운영하며 단란한 새 가정을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금왕에서 사출공장을 운영하는 오빠의 부탁을 받게 된다. 공장에 외국노동자만 있어 관리가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2002년 김 총무의 음성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섯 손가락을 잃다

베트남에서 들어온다던 외국근로자가 차질이 생겼다. 공장에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다. 김 총무의 하루가 더 바빠졌다. 지게차도 운전했다. 남자가 하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그날도 최선을 다해 일했다. 공장에는 여느 때와 같이 기계소리가 굉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 굉음을 뚫고 한순간 비명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아---” 아뿔사! 그녀의 오른손이 기계에 빨려들어 갔다. 다섯 손가락이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긴급히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보다 더한 장애인이 있었네”

절망이 찾아왔다. 고통스러웠다. 운명을 탓했지만 흐르는 건 눈물뿐이다. 집 밖을 나서기조차 무섭다.

두문불출하는 그녀에게 음성군장애인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교육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것이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행여 남들이 볼세라 두려운 마음에 싸매고 또 싸맸다. 복지관 교육실에 들어 선 순간, 양손 모두를 잃은 한 장애여인을 보고 그녀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나보다 더한 장애인이 있었네. 저분은 어떻게 사실까? 저분에 비하면 나의 장애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때 받은 충격으로 김 총무는 장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각종 볼링·꽃꽂이대회 수상

그녀의 삶의 방향이 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가슴속 아픔을 벗어버리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복지관 활동에 적극적이기 시작했다. 이때 라온제나여성모임이 조직됐다. 지난 10년간 회장직을 맡으면서 천연비누를 만들어 여성장애인 돕기에 나섰다. 붓글씨를 배우고 바느질을 익히고 그림 그리기도 배웠다. 볼링과 꽃꽂이도 배웠다. 볼링은 시작한지 2년 만에 은메달을 획득했다. 지난해에는 동메달, 올해 전국장애인체전에선 2인조 은메달과 6인조 금메달을 수상했다. 지난 2008년에는 장애인기능대회 꽃꽂이부분에 처녀 출전해 은메달을, 올해 충북장애인기능대회에선 동메달을 수상했다.

끝없는 봉사의 삶
그녀의 세상 밖 활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남편과 함께 활동보조로 8년 째 봉사하고 있다. 그녀가 돌본 한 장애인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당당히 공직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음성군지체장애인협회에서 10년간 총무로 봉사하고 있다.

김 총무는 “나도 그랬던 것처럼 많은 장애인들이 집밖을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 혼자만 불행한 사람이라고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좌절만 하고 있으면 영원히 그 좌절감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며 “일단 나오면 된다. 세상은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힘줘 말했다. 절망에서 희망의 날개를 활짝 핀 김 총무의 환한 웃음이 용기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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